★고려시대 무신의 난 주역 - 정중부
★충국(忠國)과 위민(爲民)
그가 태어났던 1212년은 최충헌의
아들 최우의 집권기였다. 김방경은 18세인
1229년(고종 16)에 음서(蔭敍)로 산원 겸
식목녹사(散員兼式目錄事)로 관직에 나아갔다.
그런데 이듬해인 1230년부터 몽골은 고려를
침공했는데, 고려는 이에 저항해 1231년에
최우는 강화로 천도해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김방경은 강화도에 들어가지
않고 몽골군과 싸웠다. 당시 강화도의
생활은 편안했으나, 육지에서는 몽골군에게
20만 명 이상의 포로가 끌려가는 등 피해가
심했다. 몽골군의 침고시기는 주로 가을이었으
므로 추수기에 농민들의 수확물을 약탈
당했으며 흉년까지 겹치기도 해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 봉착한 김방경은
강화로 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백성들과 함께 육지에서 항전했던 것이다.
그가 1248년에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
이 됐을 때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사례가 있다. 김방경은 몽골
의 침략을 피해 백성들과 함께 위도
(葦島·평안북도 정주)로 들어갔다.
김방경은 이곳에서 바다의 조수
를 막기 위해 제방을 쌓았는데, 이
제방으로 간척지를 만들어 농사를 할 수
있었다. 또한 부족한 물을 구하기 위해 못을
만들어 비를 받아 저장해 우물 대신 사용해
백성들의 생활하는데 크게 도움을 줬던
것이다. 그의 충국과 위민 사상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용장(勇將) 김방경
김방경의 활동 중에서 가장 주목할 내용
은 무장으로서의 역할이었다. 고려는 1258년
에 김준(金俊) 등에 의해 60년 지속돼 오던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김준은 다시 임연(林衍) 등에
의해 제거됐다. 이때 국왕과 무신정권과의 사이에
개경으로의 환도를 두고 현저하게 입장이 달랐다.
당시 국왕 원종은 개경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임연은 이를 거부하고 원종을 폐위하고
안경공 창(安慶公昌)을 옹립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은 원종을 복위시켜 이후
고려와 원나라와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것을
염려한 이장용(李藏用)의 천거로 김방경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마침내 1270년 6월에
개경 환도가 강행됐다. 이때 무신정권
의 조아(爪牙)였던 삼별초는 환도를 거부하고
난을 일으켰다. 삼별초는 배중손이 승화후
온(承化侯溫)을 왕으로 삼아 진도를
거점으로 한반도의 서남해지역
에서세력을 떨쳤다. 이에
고려 조정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김방경을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했다. 원나라의 장수 아해(阿海)가
삼별초의 격렬한 저항으로 후퇴하려는 것을
김방경이 저지하면서 결국 삼별초 토벌에
성공했다. 이때 배중손과 승화후 온도
전사했다. 삼별초의 남은 세력은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탐라(耽羅·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저항했다. 김방경은 1273년에 행영중
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 탐라의
삼별초를 토벌하고 시중에 올랐다.
![]() |
Global General, 김방경
김방경의 무장으로서의 면모는 2차례에
걸친 일본정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원의 세조는
삼별초를 토벌한 다음해인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일본 정벌의 야욕을 포기하지 않고 고려에 그 준비를 강요했다.
김방경은 도독사(都督使)로서 원의 도원수 홀돈(忽敦)과 함께
고려에서 제작한 선박 900척과 고려군 8천 명이 포함된
4만여 명의 여몽연합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원정군은
쓰시마섬과 잇키(壹岐)섬에서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큐슈(九州)의 하카타(博多·후쿠오카)지역에
상륙해 소하라(蘇原)의 지휘소를 점령하는
등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여기서 김방경의 공이 가장 뛰어났다.
김방경은 선박으로 돌아가자는 원 장수들을
만류하면서 마지막 총 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잔류할 것을 권했으나 결국 연합군은 선박으로
돌아갔다.그리고 그날 폭풍으로 거의 모든 선박이
파손되고 많은 사망자와 실종자를 남긴
채 원정군은 퇴각했다. 원정 결과 김방경은
상주국(上柱國)이 됐고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가
더해졌다.글로벌 제네랄 김방경은 1281년의
제2차 일본정벌에 참여했다. 이 원정은 군사 14만여
명이 동원된 규모상으로 볼 때 세계사에서도 유래를 볼 수
없는 대규모 해상 원정이었다. 이 가운데 군사 10만여
명은 남송에서 차출됐다. 연합군은 잇키섬에서 만나
공격을 하고자 했으나 남송군의 출격이 지연돼
장소를 히라도(平戶)로변경해 다카시마(鷹島)
일대에 이르렀을 때였다. 양군이 공격을
준비하던 중 폭풍이 불어 닥쳐
연합군은 변변한 공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때의 참상을 ‘고려사’에는 ‘시체가 조수를 따라
포구에 들어와 포구가 이로 말미암아 막혀서
시체를 밝고 다니게 됐다’라고 전한다.
김방경은 일본원정을 통해 고려와 원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이 됐다. 2차 원정시에 보여 주었던
용장으로서의 김방경에 대해 ‘고려사’ 김방경 열전에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당시의 상황은 남송군이
도착하지 않자 환국하자는 논의가 분분하던 때였다.
“왕의 지시로 3개월분의 식량을 가지고 왔으니
아직도 1개월분의 남아 있다. 남송군이 와서 함께
공격하면 이를 멸할 수 있다”라고 하니 감히
더 이상 말하는 장수가 없었다.
![]() |
가장 신뢰 받는 고려 사신
김방경은 반듯한 성품으로 많은 고초를 겪기도 했다.
1277년에 위득유(韋得儒) 등의 모함으로 원의
다루가치(達魯花赤) 석말천구(石抹天衢)에
의해 구금돼 거짓 자백을 강요받기도
했다. 이 일로 김방경은 백령도로
유배됐으나 원 세조에게 보낸 충렬왕의
상소로 무죄임이 밝혀졌다.이러한 곧은 성격
은 고려와 원나라 양쪽으로부터 신임을 받게되는
이유도 됐다. 즉, 김방경은 가장 믿을 만한 고려 사신이었다.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1273년 가을,
삼별초를 토벌한 뒤 김방경은 원나라로 가서
원 세조(世祖·쿠빌라이)의 환대를 받았다.
김방경은 중찬(中贊)이 올랐고 1280년에는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나라로부터 중선대부 관령 고려국도원수
(中善大夫管領高麗國都元帥)라는 직임을 받았고
1283년 삼중대광 첨의중찬 판전리사사
세자사(三重大匡僉議中贊判典理司事世子師)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이어서 첨의령(僉議令)이
가직되고 상락군 개국공 식읍 일천호 식실봉
삼백호(上洛君開國公食邑一千戶食實封三百戶)에
봉해졌다. 김방경은 1212년(강종 1)에 태어나
1300년(충렬왕 26)에 사망했으니 향년 89세였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김방경은 직언을 하는 곧은 성품의 관리
이자 국가의 명에 따라 행동을 했던 충국의 귀감
이며 애민 사상을 가진 목민관이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원나라의 사신으로 심지어는 목숨을 내건 일본원
정의 전장에 서슴지 않고 나서 국가에 충성하고
뜨겁게 백성을 사랑했던 글로벌 고려인이었던
것이다. 충렬이라는 시호는 그에 따른
합다한 조치였다.
▶외통수: 무신정권의 시기는
1170~1270 이라 외우기 쉽다. 그리고
그 시기 최고의 실권자였던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의 머리글자를 따 '정경이'로,그 뒤를 이은
최충헌-최우-최항-최의의 최씨 정권은 이름을 따
'충우항의'로, 그 뒤를 이은 김준, 임연-임유무는
머리글자와 이름을 따 '김임연유'로 하여
‘정경이 충우항의 김임연유’로 만들어
외운다. 그리고 당시 무인들이
정사를 펼치던 중심기구인 중방, 도방,
교정도감, 정방 순서를 ‘중도교정’
으로 하여 외운다.
0 무신정권(武臣政權, 1170~1270)은 100년
동안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로,
정중부(1106~1179), 경대승(1154~1183),
이의민(?~1196), 최충헌(1149~1219)-
최우(?~1249)-최항(?~1257)-최의(?~1258),
김준(김인준. 1258~1268), 임연(?~1270)
-임유무(?~1270)로 이어졌다.
0 고려 귀족문화의 번영기를 지나면서
임금과 문신들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는
가운데 무신에 대한 무시와 핍박이 극심해져갔다.
급기야 1170년 의종 24년 무신에 대한 천대를
더 이상 참기 힘들어진 정중부 이의방
이고가 중심이 되어 보현원에서
오병수 박희를 열어 무신의
노고를 위로하려 만든 자리에서
대장군 이소응이 문신 한뢰에게 구타
당하자 격분하여 난을 일으켜 임금과 태자를
축출하고 문신들을 대거 죽이거나 쫓아냈다.
곧이어 인종의 셋째아들이자 의종의 동생인
명종(1170∼1197)을 옹립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 고려는 고구려에 이어 수박
(태견, 태권도의 전신)으로 무예를
단련하였는데, 그 날도 무신들끼리 1대1
대결을 펼쳤는데 이소응이 젊은 상대에게 패하자
한뢰가 그를 조롱하며 때린 것이 무신난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이다.
- 문신 김돈중은 김부식의 아들로 촛불로
나이든 정중부의 수염을 태웠으며, 당시
그 아비인 김부식이 도리어 정중부를 나무라
정중부는 두 부자에게 깊은 원한을 새겨 두게 되었다.
1167년 의종 21년 때 ‘화살 사건’이 일어나 또다시
김돈중은 무신 쿠데타의 결정적인 원인제공자가
되기도 했다. 당시 나들이를 즐기던 의종이
행차하는 도중 좌승선 김돈중의 말이
잘못하여 어느 무사의 말과 충돌
하여 그로 인해 화살통에서
화살 한 대가 왕의 가마 옆에
떨어졌다. 의종은 이를 암살 미수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김돈중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후 화살의
주인을 찾으려 소동을 벌였지만 별다른
상황이 없자 당시 호위를 맡았던
무인들인 견룡∙순검∙지유
가운데 14명이 희생양 비슷하게
귀양을 가게 되어 무신들이 분노가
끓어 올랐다. 또한 보현원에서 무신난이
일어나자 김돈중은 재빨리 도망쳤는데, 의당
개경으로 돌아가 사태를 진압했어야 했지만 감악
산으로 도망가 숨었다가 자기 종자의
신고로 잡혀 죽는다.
- 무인들은 정변 이후 중방(重房)을 중심으로
정사를 펼쳤다. 그러나 무신세력 내부에서
권력투쟁이 일어나 1171년 이의방이 함부로
발호하던 이고를 제거했다. 이 와중에 1173년
동북면 병마사 김보당이 의종의 복위와 무신
집권 타도를 위해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의종을 죽였다. 이듬해 1
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또다시 난을 일어났다. 그러자 당시
일인자로 행세하던 이의방에 대한 불신이
커졌고, 이의방 또한 정치에 서투른데다 하급
무사에 대한 처우개선을 하지 않는가 하면
불교계를 탄압하며 민심을 잃어 갔다.
이 때를 틈타 정중부는 1174년
이의방을 제거하면서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 정중부(1106~1179)가 실권을 잡았지만 조정은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조위총의 난도 2년이
더 지나 평정되는가 하면 공주에서 망이∙망소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필두로 전국에서 끊임없는
변란이 이어졌다. 이에 정중부는 중앙의 안정
을 위해 문신을 우대하고 지방행정 개혁을
추진했지만, 실제로는 막후정치를 주도
하면서 국정을 전횡하다 결국에는
1179년 경대승이 정중부∙정균
(정중부의 아들)∙송유인(정중부의 사위)
등을 죽이고 정권을 잡았다.
- 경대승(1154~1183)은 젊고 청렴하며
원칙이 분명한 무인이었는데, 무신들의
횡포와 부패에 분노하여 정중부와 그 일당들을
타도하며 집권했다. 이후 그는 정중부 지지
세력이 잔존하던 중방을 무력화하고 특수
무사집단인 도방(都房)을 만들어 무력을
장악하는 한편 왕권 강화 정책을 중시했다.
또한 함께 참여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허승과 김광립이 발호하자 1180년 제거했고,
문관과 무관을 고루 등용하는 한편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에는 예외없이 처벌하여 국가질서를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1183년 경대승이
30살의 나이로 갑자기 병사하자 그의 정권도
무너지고 도방도 해체되었다. 그 이후 경주에 가
있던 이의민이 개경으로 올라와 정권을 잡는다.
- 이의민(?~1196)은 천민 출신으로 경군(京軍)에 있다
수박을 잘 해 의종의 총애를 받으며 별장이 되면서
급성장하였으나, 경대승이 집권하자 잠시 경주로
피신 겸 낙향해 있다가 그가 죽자 명종의 부름을
받고 올라와 집권한 것이다. 그러나 이의민은
원래부터 인품이 좋지 못해 횡포와 착취를 일삼았다.
그러다가 그의 아들 이지영이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최충수의 비둘기를 빼앗아 가자 그의 형인
최충헌이 분노하여 기회를 노리다가 이의민이
미타산 별장에 있는 것을 알고 쫓아가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무신정변의 시초 문신의 무신 차별
이번에는 바로전에 포스팅했던 교정도감
의 주인공들인 무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고합니다. 위의 사진은 공민왕릉입니다. 공민왕릉
은 북한 개성시 개풍군 해선리 무선봉의 산 중턱에
남향으로자리잡고 있으며 북한의 국보 제 123호로
지정되어있습니다. 고려왕조는 보통 왕릉만 지었
지만일한 부부왕릉인 쌍릉이라 이부분만 봐도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정은 어느정도 였는지
예상되는 부분입니다.
공민왕릉에서 볼 수 있듯이 문신과 무신의 높이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유추해볼대 문신이 무신의 지휘에 위에
있었음을 예상해 볼 수 있습니다.
▶무신정변의 발단
무신정변의 발단은 의종대인 1170년에
발생되었고 고려사에 보면 "의종 24년 8월
그믐날에 수박희(태권도와 유사한 무예의 일종)
을하였는데 대장군 이소응이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려 하니, 문신이었던 기거주 한뢰
가 이소응의 뺨을 쳐서 섬돌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하였다.
태권도와 시름의 시초로 알려진
수박희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그림
임금과 문신들이 손뼉을 치며 즐거워 하는데
정중부,김광미,양숙,진준 등은 낯빛을 바꾸고
서로 눈짓을 주고 있다가 정중부가 한뢰를 보고
'이소응이 비록 무관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렇게 심안 모욕을 주는가' 라고 꾸짖으니 임금이
정중부의 손을 잡고 말렸다"고 전해집니다.
★무신정변의 시작과 문신의 숙청
정중부는 무관이었으며 한뢰는 문신으로
전해지는데 이날밤에 무신인 이고는 이의방과
더불어 순검군을 불러 모으고 정변을 일으켜
흥왕사에 있던 문신들을 전부 살해하고
개경으로 대달아 궁궐로 진입하여 역시
문신들을 도륙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종을
폐위하여 거제도로 유배시키고 왕의 동생인
익양공 왕호를 명종으로 추대하고
무신정권을 세웠다고 합니다.
무신정변으로 인한 망국의 시작
100여년 동안 계속되는 무신정권은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맞춤이었습니다. 내부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일어나 정중부는
경대승에게 제거되고 경대승이 병으로 죽자 난폭
한 이의민이 뒤를 이어 무신정권의 수령이
되었으며, 1196년에 최충헌 일당이 이의민을 제거
하고 드디어 85년의 최씨 무신정권을
수립하게 됩니다. 최씨 무신정권은 그 후 최우,최항,
최의로 이어졌고, 최씨 집권이 끝난
뒤에김준,임안,임유무 등이 이를 이었습니다.
★공포정치로 인해 전국에 난 발생
무신들의 공포정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각지에서는 반란과 농민봉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1173년부터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의난,서경
유수 조위총의 난, 명학소의 망이,망소이의 난, 관성,
부성의 농민봉기, 김사미와 효심의 농민발란등
이어서도 지속되는 난이 일어났습니다. 고려는 더이상
백성들에게희망을 줄 수 있는
국가가 아니였습니다.